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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역사

1914~1918년 제1차 세계대전과 영국의 역할

by info-lulu 2025. 2. 11.

1914~1918년 제1차 세계대전과 영국의 역할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영국의 참전 배경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가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암살되면서 유럽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 사건을 빌미로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후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이 잇따라 개입하며 유럽 전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영국은 처음부터 전쟁에 직접 개입할 의사가 없었지만, 독일의 벨기에 침공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영국은 1839년 체결된 런던 조약(London Treaty)을 근거로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독일이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을 실행하며 벨기에를 공격하자, 1914년 8월 4일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며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영국의 참전은 단순한 군사적 개입을 넘어선 것이었다. 영국은 광대한 제국을 보유한 강대국으로서,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세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었다. 특히 독일이 유럽 대륙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할 경우, 영국의 해상 패권과 무역로가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서부전선에서의 영국군과 주요 전투

영국은 전쟁 초기에 영국 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 BEF)을 프랑스로 파견했다. 그러나 1914년 말까지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서부전선(Western Front)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 참호전(trench warfare)이 본격화되면서 양측은 수 년간 극심한 소모전을 벌여야 했다.

 

1916년 영국군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된 솜 전투(Battle of the Somme)를 수행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지만, 하루 만에 57,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등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영국 해군 역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유틀란트 해전(Battle of Jutland, 1916)에서 영국과 독일 해군은 북해에서 대규모 해전을 벌였으며, 비록 영국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독일 해군의 적극적인 작전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영국군은 새로운 무기와 전술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탱크(Tank)는 1917년 캉브레 전투(Battle of Cambrai)에서 처음으로 대규모로 사용되며 서부전선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영국의 전쟁 수행과 국내 사회 변화

전쟁은 영국 사회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정부는 전시경제 체제(Wartime Economy)를 도입하여 공업 생산을 전쟁 물자로 집중시켰고, 국민들에게 전쟁 채권을 구매하도록 독려했다.

한편, 많은 남성들이 전쟁터로 떠나면서 노동력 부족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에 따라 여성들이 대거 노동시장에 진출하였고, 공장, 운송업,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영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으며, 전후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언론과 선전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영국 정부는 국민의 사기를 유지하고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독일 감정(Anti-German Sentiment)을 부추기는 선전물을 대량으로 제작했다. 또한,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식량 배급제(Food Rationing)가 도입되었으며, 국가 총동원 체제가 강화되었다.

전쟁 막바지에는 미국의 참전(1917년)이 결정적인 변수가 되었다.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Unterseeboot warfare)을 감행하자, 미국이 연합군 측에 가담하면서 독일은 더욱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전쟁의 종식과 영국의 국제적 위상 변화

1918년, 연합군은 독일군을 서서히 밀어붙이기 시작했고, 독일 내에서는 반전 여론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결국 1918년 11월 11일, 독일은 컴피엔 휴전 협정(Armistice of Compiègne)에 서명하며 전쟁이 종식되었다.

전쟁 후 영국은 승전국으로서 파리 강화 회의(Paris Peace Conference, 1919)에 참여하여 독일에 대한 처벌과 유럽의 재편을 주도했다.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는 독일이 다시는 유럽의 위협이 되지 않도록 강력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1919)을 통해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받았고, 군사력도 대폭 축소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승리는 영국에 엄청난 희생을 요구했다. 100만 명 이상의 영국 군인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전쟁 비용으로 인해 국고가 크게 소모되었다. 또한, 전후 대영제국의 지배력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인도와 아일랜드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해졌으며, 1920년대 이후 영국은 점차 식민지 통제력을 잃어가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영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남게 했지만, 동시에 경제적 피로와 제국의 균열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영국은 전후 복구와 국제 정치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론

제1차 세계대전은 영국에게 승리의 기쁨과 동시에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한 전쟁이었다. 전쟁 초기,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을 지키기 위해 참전했으나, 결국 유럽과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서부전선에서의 치열한 전투, 유틀란트 해전과 같은 해상 전투, 그리고 전쟁 수행을 위한 국내 개혁들은 영국을 강대국으로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전후 영국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경제적으로 피폐해졌고, 제국 내부에서는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또한, 미국과 소련이 점차 국제 무대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영국의 상대적 지위는 점점 약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