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통과 역사

1815년 워털루 전투와 나폴레옹 전쟁의 종식

by info-lulu 2025. 2. 11.

나폴레옹의 복귀와 유럽의 긴장 고조

1814년, 유럽 연합군은 나폴레옹을 패배시키고 그를 엘바 섬(Elba)으로 유배 보냈다. 하지만 1815년 3월,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프랑스로 돌아왔고, 불과 100일 만에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귀환 소식은 유럽 전역을 긴장시켰으며,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주요 열강들은 나폴레옹을 제거하기 위해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나폴레옹은 그의 군대를 다시 조직하고, 유럽 대륙에서의 마지막 승리를 노렸다. 그의 전략은 벨기에를 빠르게 침공하여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을 분리시킨 후, 개별적으로 격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1815년 6월 18일, 벨기에의 작은 마을 워털루(Waterloo)에서 결정되었다.

 

1815년 워털루 전투와 나폴레옹 전쟁의 종식

 

워털루 전투의 시작과 양측의 전략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약 7만 3천 명의 병력을 지휘했고, 이에 맞서는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은 웰링턴 공작(Arthur Wellesley)이 이끄는 6만 8천 명의 군대였다. 또한, 프로이센군 5만 명이 원군으로 이동 중이었다.

나폴레옹은 그의 전술적 감각을 발휘하여 적군의 중앙을 압박하고 측면을 포위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는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이 프로이센군과 합류하기 전에 그들을 궤멸시키고자 했다.

웰링턴 공작은 방어적인 전략을 채택하여 워털루의 고지대에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버티는 전술을 펼쳤다. 그는 프랑스군의 돌격을 예상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병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했다.

오전 11시경, 프랑스군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은 포병대를 이용하여 적의 방어진을 약화시키고, 보병과 기병대를 동원해 강력한 돌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영국군의 방어는 예상보다 강력했다.

 

전투의 격화와 프랑스군의 난관

전투 중반, 나폴레옹의 부하이자 용맹한 지휘관인 미셸 네이(Michel Ney) 원수는 영국군의 중앙이 무너졌다고 오판하고, 대규모 기병 돌격을 감행했다. 그는 5천 명 이상의 기병을 이끌고 영국군 방어진을 돌파하려 했지만, 웰링턴 공작은 이를 예측하고 ‘방진(square formation)’을 형성하여 기병의 돌파를 저지했다.

프랑스군은 네이의 돌격이 실패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고, 전장의 주도권을 점점 잃어갔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그의 정예 부대인 제국 근위대(Imperial Guard)를 투입하여 전세를 뒤집으려 했지만,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의 협력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점점 밀려났다.

오후 4시경, 블뤼허(Blücher)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전장에 도착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프랑스군은 측면에서 프로이센군의 공격을 받았고, 동시다발적인 압박 속에서 패퇴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의 패배와 유배

전투가 끝나갈 무렵, 나폴레옹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제국 근위대를 투입했지만, 이들마저 패배하고 후퇴하면서 프랑스군의 사기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프랑스군의 퇴각이 시작되자, 웰링턴 공작은 "적군이 무너졌다"(The enemy is running)라고 외쳤고, 연합군은 마지막 반격을 가했다. 제국 근위대는 한때 "제국 근위대는 후퇴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외침과 함께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많은 병사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거나 포로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전투에서 패배한 후 프랑스로 도망쳤지만, 정치적 지지를 잃고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1815년 7월, 그는 영국 해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로 유배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1821년까지 남은 생을 보내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워털루 전투의 역사적 의의

워털루 전투는 유럽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 전투의 결과로 프랑스 제국은 완전히 몰락했고, 유럽의 질서는 새로운 방향으로 정립되었다.

  1. 나폴레옹 전쟁의 종식
    •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나폴레옹은 완전히 실각했고, 그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 프랑스는 다시 부르봉 왕조로 복귀하였으며, 나폴레옹이 이룩한 제국은 해체되었다.
  2. 빈 회의(Congress of Vienna)와 유럽의 재편
    • 워털루 전투 이후 유럽 열강들은 빈 회의를 통해 프랑스를 견제하고, 유럽 전역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 이는 ‘유럽 협조 체제(European Concert)’로 이어져, 이후 19세기 유럽의 질서를 결정짓는 기반이 되었다.
  3. 영국의 패권 강화
    •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영국은 이후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자리 잡았다.
    • 영국은 해양 패권을 유지하면서 유럽 대륙의 분쟁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국제 질서를 주도했다.
  4. 나폴레옹의 유산
    • 나폴레옹은 패배했지만, 그의 행정 개혁과 법 체계(나폴레옹 법전)는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 이후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나폴레옹이 도입한 근대적인 행정 시스템과 군사 전략을 받아들였다.

워털루 전투는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전투였으며, 유럽의 새로운 질서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유럽은 오랜 전쟁을 끝내고 비교적 안정된 국제 체제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