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처리즘의 탄생: 경제 위기와 보수당의 부상
(영국 경제 위기, 복지 국가의 한계, 보수당의 집권)
1970년대 영국은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복지국가를 건설하며 국민 건강 서비스(NHS), 사회 보장 제도, 국가 주도의 경제 운영을 중심으로 한 혼합 경제 체제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석유 파동, 노동조합의 강한 영향력, 생산성 저하 등으로 인해 영국 경제는 정체되었고,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인해 국가 재정은 크게 악화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위기는 정치적 불안정으로 이어졌다. 1974년 노동당 정부는 강경한 노동조합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이로 인해 임금 인상이 지속되며 물가 상승을 더욱 부추겼다. 1978~1979년 겨울,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이라 불리는 대규모 파업 사태가 발생했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대거 파업에 돌입하면서 병원, 공공 서비스, 쓰레기 처리 등의 기능이 마비되었고, 국민들은 노동당 정부의 무능함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는 자유 시장 경제와 정부 개입 축소를 강조하며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1979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면서, 영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인 마거릿 대처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녀는 "정부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 자체가 문제"라는 신념 아래 강력한 경제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대처리즘의 핵심: 신자유주의 정책과 경제 개혁
(시장 자유화, 국영 기업 민영화, 금융 개혁)
마거릿 대처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경제 정책을 도입하며, 정부의 시장 개입을 최소화하고 개인과 기업의 자유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그녀의 경제 정책, 이른바 "대처리즘(Thatcherism)"은 다음과 같은 핵심 요소로 구성되었다.
첫째, 국영 기업의 대대적인 민영화였다. 1980년대 초반, 영국 경제는 여전히 국영 기업 중심의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처는 민간 부문의 경쟁을 활성화하기 위해 영국항공(British Airways), 브리티시 텔레콤(BT), 브리티시 가스(British Gas), 브리티시 스틸(British Steel) 등 주요 국영 기업을 민영화했다. 이를 통해 정부의 재정 부담을 줄이고, 시장 경쟁을 촉진하여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다.
둘째,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켰다. 대처 정부는 노동조합이 국가 경제를 위협하는 주범이라고 판단하고, 파업권을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984~1985년 발생한 탄광 노동자 파업(Miners' Strike)은 대처 정부와 노동조합 간의 대표적인 충돌 사례였다. 정부는 강경한 대응을 펼쳐 노동조합의 영향력을 크게 줄였으며, 이는 이후 영국 노동 시장의 유연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금융 시장 개혁과 세금 감면을 단행했다. 대처 정부는 금융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런던 금융 시장을 개방하고, 각종 규제를 철폐했다. 또한, 기업과 개인의 세율을 대폭 낮춰 투자와 경제 활동을 장려했다. 특히 부유층과 기업의 세금을 줄이고, 부가가치세(VAT)를 인상하는 방식으로 세수 구조를 조정했다. 이는 중산층과 저소득층에게 부담을 전가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대처는 "부가 먼저 창출되어야 재분배가 가능하다"는 논리를 펼쳤다.
대처리즘의 성과와 논란
(경제 성장, 실업률 증가, 빈부 격차 확대)
대처 정부의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영국 경제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1980년대 초반, 긴축 재정과 고금리 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기업이 도산했고, 실업률이 1983년 11%까지 치솟았다. 특히 전통적인 공업 지대였던 북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지역이 큰 타격을 입었다. 이는 대처의 경제 개혁이 "남부의 번영, 북부의 붕괴"라는 지역 불균형을 초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대처의 개혁이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민영화와 금융 개혁으로 인해 런던 금융 시장이 세계적인 중심지로 성장했고, 외국 자본이 유입되면서 경제 성장이 본격화되었다. 또한, 인플레이션이 안정되었고, GDP 성장률이 회복되면서 영국 경제는 활력을 되찾았다.
하지만 대처리즘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유발했다.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근로자들의 권리가 축소되었고, 복지 축소로 인해 저소득층의 생활이 어려워졌다. 또한, 부유층과 대기업에게 유리한 세금 감면 정책으로 인해 빈부 격차가 확대되었다. 대처 정부가 진행한 공공 주택 매각 정책(Right to Buy)은 일부 중산층이 내 집을 마련하는 기회를 제공했지만, 장기적으로 공공 임대주택의 부족을 초래해 주택 시장 불균형을 심화시켰다.
대처리즘의 유산과 영국 사회에 미친 영향
(보수당의 정치적 지배, 신자유주의 유산, 사회적 논쟁 지속)
마거릿 대처는 1990년까지 11년간 총리직을 유지하며 영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 그녀의 정책은 영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었고,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정착시켰다.
대처 퇴임 이후에도 영국 정치와 경제에는 그녀의 유산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1997년 집권한 토니 블레어(Tony Blair)의 노동당 정부조차 대처의 시장 중심 정책을 상당 부분 계승하며 "제3의 길(The Third Way)"을 주장했다. 이는 대처리즘이 단순한 한 시대의 정책이 아니라, 영국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처리즘의 부작용도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많은 이들이 1980년대 금융 규제 완화가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또한, 대처의 복지 축소 정책은 영국 사회에서 공공 서비스의 질 저하와 빈부 격차 확대를 초래한 요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마거릿 대처는 "영국을 되살린 영웅"과 "사회 불평등을 심화시킨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영국 현대 정치와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신자유주의적 경제 모델이 이후 서구 사회에서 보편화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전통과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07년 노예무역 폐지와 영국의 인권 개혁 (0) | 2025.02.12 |
---|---|
1707년 대영제국의 탄생: 잉글랜드-스코틀랜드 합병 (0) | 2025.02.12 |
로마 브리튼 시대(기원전 43년~410년)와 영국의 초기 발전 역사 (1) | 2025.02.12 |
1997년 홍콩 반환과 영국의 외교 정책 변화 (0) | 2025.02.12 |
1956년 수에즈 위기와 영국의 국제적 위상 변화 (0) | 2025.02.12 |
1947년 인도 독립과 대영제국의 해체 (0) | 2025.02.11 |
1939~1945년 제2차 세계대전과 처칠의 지도력 (0) | 2025.02.11 |
1914~1918년 제1차 세계대전과 영국의 역할 (0) | 2025.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