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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홍콩 반환과 영국의 외교 정책 변화 홍콩 반환의 역사적 배경: 대영제국과 중국의 충돌(난징조약, 식민 지배, 일국양제 합의)  홍콩은 19세기 중반 아편전쟁(1839~1842)의 결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청나라가 전쟁에서 패배한 후, 1842년 체결된 난징조약에 따라 영국은 홍콩섬을 할양받았으며, 이후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구룡반도를 추가로 획득했다. 1898년, 영국은 신계(뉴 테리토리) 지역을 99년간 조차하는 협정을 체결하면서, 홍콩의 영토는 더욱 확장되었다.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며 홍콩은 아시아 금융의 중심지로 성장했지만, 반환 기한이 다가오면서 홍콩의 미래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70년대 말,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며 국제 사회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었고, 홍콩 반환 문제는 영국과 중국 .. 2025. 2. 12.
1979년 마거릿 대처와 신자유주의 정책 대처리즘의 탄생: 경제 위기와 보수당의 부상(영국 경제 위기, 복지 국가의 한계, 보수당의 집권) 1970년대 영국은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복지국가를 건설하며 국민 건강 서비스(NHS), 사회 보장 제도, 국가 주도의 경제 운영을 중심으로 한 혼합 경제 체제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석유 파동, 노동조합의 강한 영향력, 생산성 저하 등으로 인해 영국 경제는 정체되었고,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인해 국가 재정은 크게 악화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위기는 정치적 불안정으로 이어졌다. 1974년 노동당 정부는 강경한 노동조합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이로 인해 임금 인상이 지속되며 물가 상승을 더욱 부추겼다. 1978~1979년 겨울, "불만의 .. 2025. 2. 12.
1956년 수에즈 위기와 영국의 국제적 위상 변화 수에즈 운하의 전략적 가치와 영국의 의존(수에즈 운하, 영국 경제, 중동 전략) 수에즈 운하는 1869년 개통 이후 세계 해상 무역의 핵심 요충지로 자리 잡았다.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이 운하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가장 중요한 해상 경로였으며, 영국에게는 특히 전략적 가치가 컸다. 영국은 인도와의 교역 및 중동 지역의 석유 공급망을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해 이 운하를 필수적인 통로로 활용했다. 19세기 말, 영국은 이집트 정부의 지분을 매입하며 수에즈 운하의 실질적인 통제권을 확보했다. 이후 이집트가 형식적으로 자치권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운하를 통해 경제적·군사적 이익을 극대화하며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 지역에서 탈식민지화가 가속화되면서 영국의.. 2025. 2. 12.
1947년 인도 독립과 대영제국의 해체 대영제국의 정점과 인도의 독립 운동 고조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대영제국(British Empire)은 전 세계에서 가장 넓은 식민지를 보유한 강대국이었다. 특히 인도는 "대영제국의 보석(The Jewel in the Crown)"이라 불릴 정도로 중요한 식민지였으며, 영국 경제와 군사력 유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인도에서의 독립운동이 점점 고조되면서, 영국은 강한 내부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다. 인도의 독립 운동은 19세기 후반 인도 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 INC)와 전인도 무슬림 연맹(All-India Muslim League)을 중심으로 본격화되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동안 인도인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점진적인 자치 확대.. 2025. 2. 11.
1939~1945년 제2차 세계대전과 처칠의 지도력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영국의 참전 결정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유럽은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이전부터 체코슬로바키아 합병(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1938년) 등을 통해 유럽의 패권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군사적 팽창을 억제하지 못한 채 유화정책(Appeasement)을 유지했다. 그러나 독일이 소련과 독소 불가침 조약(Nazi-Soviet Non-Aggression Pact, 1939년)을 체결한 뒤, 폴란드를 공격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더 이상 이를 묵과할 수 없었다.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며 공식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했다.이 시기 영국의 총리는 네.. 2025. 2. 11.
1914~1918년 제1차 세계대전과 영국의 역할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영국의 참전 배경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가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암살되면서 유럽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 사건을 빌미로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후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이 잇따라 개입하며 유럽 전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영국은 처음부터 전쟁에 직접 개입할 의사가 없었지만, 독일의 벨기에 침공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영국은 1839년 체결된 런던 조약(London Treaty)을 근거로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독일이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을 실행하며 벨기에를 공격하자, 1914년 8월 4일 영국은 독일에 .. 2025. 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