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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역사

이란의 입헌 혁명(1905-1911)과 근대 정치의 태동

by info-lulu 2025. 3. 3.

 

이란의 입헌 혁명(1905-1911)과 근대 정치의 태동

입헌 혁명의 배경: 사회적·경제적 불만과 개혁 요구

이란의 입헌 혁명(Constitutional Revolution)은 1905년부터 1911년까지 진행된 역사적 사건으로, 전통적인 왕정 체제를 근대적 헌법과 의회를 포함한 정치 체제로 개혁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이 혁명의 배경에는 19세기 후반부터 누적된 경제적 위기, 외세의 개입, 그리고 정치적 부패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이란은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의 통치 아래 있었으며, 국왕들은 방만한 재정 운영과 부정부패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와 영국이 이란의 경제와 정치에 깊이 개입하며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특히, 이란 정부가 외국 기업들에게 담배, 광물, 도로 건설 등의 독점권을 부여하면서 국민들의 불만이 커졌다.

1890년대, 이란인들은 영국 기업에 대한 담배 독점권 부여에 반발하여 ‘담배 저항 운동(Tobacco Protest)’을 일으켰고, 이는 대중이 정부의 경제 정책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 운동은 종교 지도자들과 상인 계층의 연대로 이루어졌으며, 이후 입헌 혁명의 전초전 역할을 하였다.

 

혁명의 발발: 입헌주의 요구와 의회의 탄생

1905년, 이란에서 본격적인 입헌 혁명이 시작되었다.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은 테헤란에서 상인들이 정부의 가혹한 세금 정책에 반발하여 주도한 항의 시위였다. 시위는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이어졌고, 이에 반발한 상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성지(Shah Abdul Azim)로 피신하여 ‘바스티(Basti, 성역 피신)’라는 전통적인 저항 수단을 사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란인들은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입헌주의(Constitutionalism)’라는 개념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1906년, 국민들의 거센 요구에 직면한 무자파르 앗딘 샤(Mozaffar ad-Din Shah)는 결국 헌법 제정을 약속하였고, 같은 해 8월, 이란 역사상 최초로 ‘마즈리스(Majlis, 국회)’가 설립되었다.

이란 의회는 1906년 12월에 최초의 헌법을 채택하였으며, 이는 유럽식 헌정 체제를 본뜬 것이었다. 헌법에는 입헌 군주제의 개념이 도입되었으며,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의회의 입법권과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란 국민들은 오랫동안 지속된 전제군주의 지배에서 벗어나, 보다 근대적인 정치 질서를 구축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입헌 혁명의 위기: 왕권 회복 시도와 내부 갈등

입헌 혁명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07년 무자파르 앗딘 샤가 사망하고, 그의 후계자인 모하마드 알리 샤(Mohammad Ali Shah)가 즉위하면서 입헌 체제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모하마드 알리 샤는 강력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반(反)입헌 정책을 추진하였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의회를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1908년, 모하마드 알리 샤는 왕실 친위대(쿠삭 군, Cossack Brigade)를 동원하여 마즈리스를 공격하였고, 의회를 지지하는 인사들을 체포하거나 처형하였다. 이에 따라 입헌주의자들은 테헤란을 떠나 지방에서 반군을 조직하였고, 1909년에는 결국 왕을 축출하고 다시 입헌 정부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입헌 혁명 내부에서도 개혁파와 보수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서구식 법률과 사회 개혁에 반대하며 전통적인 이슬람 법(Shariah)을 유지할 것을 주장했고, 개혁파 지식인들은 근대적 교육과 행정 개혁을 통해 서구식 국가 모델을 도입하려 했다. 이러한 내부 갈등은 혁명의 지속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외세의 개입과 혁명의 좌절

입헌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이란은 국제적인 외압에도 직면하게 되었다. 1907년, 영국과 러시아는 ‘영-러 협정(Anglo-Russian Agreement)’을 체결하고 이란을 각각 남북으로 나누어 지배하려 하였다. 북부는 러시아의 영향권, 남부는 영국의 영향권으로 설정되었으며, 이는 이란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였다.

이란 내부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러시아는 군대를 파견하여 혁명 세력을 탄압하였고, 결국 1911년에는 보수 세력이 다시금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 인해 입헌 혁명의 성과는 상당 부분 후퇴하였으며, 마즈리스는 해산되고 개혁파들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혁명의 영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많은 이란인들은 헌법과 국민의 권리를 지키려는 노력을 지속하였으며, 이후 20세기 내내 반복된 민주주의 운동과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입헌 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유산

이란의 입헌 혁명은 비록 단기적으로는 실패로 끝났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이란 사회와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입헌 혁명은 이란 국민들에게 정치적 권리에 대한 개념을 심어주었으며, 왕권의 절대적 권력이 도전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의회주의와 근대적 법률 체계 도입을 시도함으로써 이란의 정치 구조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였다.

이후 1921년 레자 샤(Reza Shah)의 등장과 함께 이란은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로 재편되었지만, 입헌 혁명의 정신은 20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1950년대 모하마드 모사데그(Mohammad Mossadegh)의 민족주의 운동과 1979년 이란 혁명에서도 입헌 혁명의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1905-1911년의 이란 입헌 혁명은 근대적 정치 질서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외세의 개입과 내부 갈등으로 인해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후 이란의 정치적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현대 이란 민주주의 운동의 초석을 놓은 사건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