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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역사

이탈리아의 통일과 초기 경제 정책의 변화

by info-lulu 2025. 3. 2.

 

이탈리아의 통일과 초기 경제 정책의 변화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배경: 분열된 국가에서 하나의 민족으로

19세기 초반까지 이탈리아 반도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국가들로 나뉘어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1803~1815)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며 일부 지역이 통합되었지만, 빈 체제(1815) 이후 다시 여러 개의 군소 국가로 분열되었다. 북부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지배하는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중부는 교황령이, 남부는 나폴리 왕국(두 시칠리아 왕국)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열 상태에서 이탈리아 통일 운동(Risorgimento)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핵심 인물로는 사르데냐 왕국의 총리 카밀로 디 카부르(Camillo di Cavour), 혁명가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 그리고 군사 지도자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가 있었다. 카부르는 현실적인 외교 전략을 통해 사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북부 이탈리아를 통합하고자 했으며, 가리발디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국민적인 지지를 받아 무장 봉기를 이끌었다.

1859년 사르데냐 왕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오스트리아를 격파하면서 롬바르디아를 획득했으며, 1860년에는 가리발디가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점령하면서 남부 이탈리아가 통일 과정에 합류했다. 1861년 3월,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이탈리아의 초대 국왕으로 선포되면서 이탈리아 왕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와 교황령은 여전히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다.

 

통일 이후의 정치적 과제: 새로운 국가 체제 확립

이탈리아가 공식적으로 통일되었지만, 정치적 통합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였다. 북부와 남부 지역 간의 경제적, 사회적 격차가 심각했으며, 언어와 문화적 차이도 존재했다. 특히, 가리발디가 점령한 남부 이탈리아 지역은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었으며, 사르데냐 중심의 북부 정치 구조와 융합하는 과정에서 혼란이 발생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도입하여 통일 이후의 행정 시스템을 정비했다. 1866년에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통해 베네치아를 확보하였고, 1870년에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틈타 로마를 점령하면서 최종적으로 교황령을 병합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는 통일을 완성했으며, 로마가 새 수도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교황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교황 비오 9세는 로마 점령을 인정하지 않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이탈리아 정부와 협력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비오의 비난(Syllabus of Errors)" 을 발표했다. 이러한 긴장 관계는 1929년 라테란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탈리아 경제의 통합과 산업화 추진

이탈리아 통일 이후 가장 큰 경제적 과제는 지역 간의 경제 격차를 해소하고 산업화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북부 이탈리아는 상대적으로 산업 기반이 발달해 있었지만, 남부는 여전히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통일 정부는 국가 경제를 통합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

첫 번째로, 국가 재정 통합 정책 이 시행되었다. 각 지역에서 사용되던 다른 화폐를 통일된 이탈리아 리라(Lira)로 대체하고, 중앙은행을 설립하여 금융 시스템을 정비했다. 또한, 관세 장벽을 철폐하고 전국적인 시장을 형성하여 경제적 일체화를 추진했다.

두 번째로, 산업화를 촉진하는 정책 이 도입되었다. 정부는 철도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지역 간 교통과 물류를 개선했다. 주요 철도망이 개설되면서 밀라노, 토리노, 제노바 같은 북부 도시들이 산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특히, 중공업과 섬유 산업이 발달하면서 이탈리아는 점차 자급자족적인 경제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반면, 남부 이탈리아는 여전히 낙후된 상태였다. 토지 개혁이 실패하면서 농민들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고, 산업 기반도 부족했다. 이에 따라 많은 남부 이탈리아인들이 미국, 아르헨티나 등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다.

 

경제 정책의 변화와 국제 무역 확대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정부는 국내 경제 발전을 위해 보호무역 정책을 도입했다. 1887년에는 "크리스피 관세법(Crispi Tariff)" 을 시행하여 외국 상품에 대한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국내 산업을 보호했다. 이러한 보호무역 정책은 북부의 산업 성장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외국과의 무역 마찰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탈리아는 또한 해외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1882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함께 삼국 동맹(Triple Alliance) 을 체결하며 유럽에서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했다. 또한, 아프리카 식민지 확장을 통해 새로운 자원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했으며, 1885년에는 에리트레아, 1890년에는 소말릴란드를 식민지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식민지 정책은 경제적 성과를 거두기보다는 재정적 부담을 초래했다. 이탈리아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다른 유럽 열강에 비해 부족했기 때문에, 식민지 경영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탈리아 통일 이후의 경제적 성과와 한계

이탈리아 통일 이후 50년 동안 경제적 성과는 분명히 존재했다.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산업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철도 건설과 금융 개혁을 통해 경제 통합이 이루어졌다. 이탈리아는 유럽 내에서 중진국 수준의 경제력을 갖춘 국가로 성장했으며, 유럽 경제 질서에서 점차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북 격차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았다. 남부 이탈리아의 경제적 낙후 상태는 계속되었으며, 이로 인해 사회적 불만과 빈곤 문제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20세기 초반에도 지속되었으며, 결국 파시즘이 대두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이탈리아의 산업화는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진행되었으며, 기술력과 생산성 면에서도 뒤처졌다. 이러한 경제적 한계는 20세기 초반 이탈리아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성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탈리아의 통일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경제적 변화와 긴밀히 연결된 과정이었다. 경제 통합과 산업화를 추진하면서도 남북 간의 격차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이탈리아가 이후 겪게 될 정치적, 사회적 갈등의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초기 경제 정책의 한계는 20세기 들어 파시즘과 세계대전 속에서 더욱 부각되었으며, 이탈리아의 경제적 발전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