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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역사

1775년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 미국 독립전쟁의 서막

by info-lulu 2025. 2. 7.

혁명의 불씨 – 영국의 통제 강화와 식민지의 반발

1770년대 영국과 북미 13개 식민지 사이의 갈등은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프랑스-인디언 전쟁(1754~1763) 이후 영국은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에 각종 세금을 부과했다. 1765년의 인지세법, 1773년의 차법(Tea Act) 등은 식민지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이후 영국은 ‘강제법(Intolerable Acts)’을 시행하며 매사추세츠 식민지를 강력하게 통제하려 했다.

 

이에 대응해 식민지 대표들은 1774년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대륙회의를 열고 영국에 대한 저항을 결의했다. 매사추세츠에서는 민병대가 조직되었고, 무기와 화약을 비밀리에 비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영국은 매사추세츠 총독이자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토머스 게이지(Thomas Gage) 장군을 통해 반란을 진압하고 무기 보급을 차단하려 했다.

 

1775년 4월, 게이지는 식민지군이 콩코드(Concord)에 무기와 화약을 비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700여 명의 영국 정규군을 보내 이를 압수하고, 식민지 지도자 존 핸콕(John Hancock)과 새뮤얼 아담스(Samuel Adams)를 체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식민지군은 이미 정보를 입수했고, 이에 대비해 민병대를 준비시켰다. 이처럼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수년간 쌓여온 식민지와 영국 간의 긴장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775년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 미국 독립전쟁의 서막

첫 번째 충돌 – 렉싱턴에서 울린 독립전쟁의 총성

1775년 4월 18일 밤, 영국군은 보스턴을 출발하여 콩코드로 향했다. 식민지군은 이에 대비해 첩보망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특히 폴 리비어(Paul Revere), 윌리엄 도즈(William Dawes), 새뮤얼 프레스콧(Samuel Prescott) 등의 기마전령이 “영국군이 온다!”(The British are coming!)라는 경고를 전하며 민병대를 소집했다.

 

4월 19일 새벽, 영국군은 렉싱턴(Lexington)에 도착했다. 여기에는 존 파커(John Parker) 대위가 이끄는 약 70명의 민병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영국군과 민병대는 한동안 대치했으며, 서로에게 총을 쏠 것인가를 두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런데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누가 먼저 쏘았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총성이 결국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영국군은 정규군의 훈련된 전술로 민병대를 쉽게 물리쳤고, 민병대는 몇 분 만에 흩어졌다. 이 전투에서 8명의 민병대원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영국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영국군의 목적지는 렉싱턴이 아니라 콩코드였다. 그들은 즉시 행군을 계속했다.

 

콩코드 전투 – 민병대의 반격과 영국군의 후퇴

영국군은 아침 8시경 콩코드에 도착하여 무기 창고를 수색했으나, 대부분의 무기와 화약이 이미 민병대에 의해 옮겨진 뒤였다. 실망한 영국군은 남아 있는 소량의 물자만 파괴한 후, 마을을 떠나려 했다. 그러나 이때 콩코드 북교(North Bridge)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미 주변 지역에서 소집된 수백 명의 민병대가 콩코드에 도착해 있었으며, 그 수는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그들은 영국군이 마을을 불태울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선제공격을 결정했다. 오전 11시경, 민병대는 북교를 건너던 영국군과 충돌했고, 양측 간의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몇몇 영국군이 사망하면서, 영국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콩코드의 총성(The shot heard 'round the world)”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이는 단순한 작은 교전이 아니라, 전 세계에 미국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영국군의 퇴각 – 민병대의 게릴라 전술

영국군은 콩코드에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보스턴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문제는 후퇴하는 길이었다. 이미 수천 명의 민병대가 주변에 집결해 있었고, 그들은 나무와 돌담 뒤에 숨어 영국군을 공격했다.

이러한 전투 방식은 영국군이 익숙한 개방된 전장에서의 전투와는 달랐다. 정규군이 조직적으로 싸우는 것과 달리, 민병대는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여 영국군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도로를 따라 후퇴하는 영국군은 곳곳에서 습격을 당했고, 많은 병력이 희생되었다.

 

결국 영국군은 추가 지원군의 도움을 받아 보스턴으로 돌아왔으나, 이 전투에서 총 273명의 사상자를 냈다. 반면 민병대는 약 9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영국군은 북미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였지만, 식민지군의 예상치 못한 저항과 전술에 큰 타격을 입었다.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의 역사적 의의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는 단순한 소규모 전투가 아니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미국 독립전쟁(American Revolutionary War)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식민지군의 승리는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이 되었다. 이 전투 이후, 매사추세츠를 포함한 13개 식민지는 더욱 단결하여 대륙군(Continental Army)을 조직했다.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영국과의 전면적인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또한,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는 미국 독립선언(1776년)으로 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식민지인들은 독립에 대한 열망을 더욱 강하게 가지게 되었으며, 영국과의 화해는 점점 불가능해졌다.

국제적으로도 이 전투는 큰 의미를 가졌다. 특히 프랑스는 이후 미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미국 독립전쟁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국, 1775년 4월 19일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울린 총성은 단순한 충돌이 아니라, 자유와 독립을 위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 전투에서 민병대는 세계 최강의 영국군을 상대로 용감하게 맞섰으며, 이들의 희생은 미국의 탄생을 알리는 첫걸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