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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역사

1692년 세일럼 마녀재판: 광기의 시대와 집단적 히스테리

by info-lulu 2025. 2. 7.

1692년 세일럼 마녀재판: 광기의 시대와 집단적 히스테리

마녀광풍의 시작 – 종교적 열망과 사회적 불안

17세기 말,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작은 마을 세일럼(Salem)은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마녀재판이 벌어진 장소가 되었다. 1692년에 시작된 세일럼 마녀재판(Salem Witch Trials)은 불과 1년 만에 200명 이상의 주민들이 마녀로 고발되고, 19명이 처형되는 참극을 낳았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종교적 신념, 사회적 불안, 경제적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당시 매사추세츠 식민지는 청교도(Puritans)들이 주도하는 사회로, 이들은 신앙적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종교적 규율을 적용했다. 그들은 악마(Satan)의 존재를 강하게 믿었으며, 악마와 계약을 맺은 ‘마녀’가 사회를 위협할 수 있다고 여겼다.

1690년대의 뉴잉글랜드는 내부적, 외부적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식민지 확장은 원주민과의 충돌을 불러왔고, 프랑스와의 전쟁도 지속되었다. 게다가 전염병과 기근이 잦아지면서 마을 주민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사회적 긴장은 마녀사냥의 불씨가 되었다.

 

1692년 1월, 세일럼 마을의 목사 새뮤얼 패리스(Samuel Parris)의 딸 엘리자베스 패리스(Elizabeth Parris)와 조카 애비게일 윌리엄스(Abigail Williams)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경련과 발작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상한 말을 내뱉으며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였고, 이후 다른 소녀들도 유사한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의사는 ‘악마의 저주’라는 진단을 내렸고, 소녀들은 자신들에게 저주를 건 마녀로 몇몇 여성들을 지목했다. 이렇게 세일럼 마녀재판의 서막이 올랐다.

 

고발과 재판 – 의심과 공포 속의 처형

1692년 3월, 첫 번째로 지목된 ‘마녀’들은 티투바(Tituba), 사라 굿(Sarah Good), 사라 오스본(Sarah Osborne)이었다. 티투바는 목사 패리스의 노예로, 바베이도스 출신의 흑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주술적인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의심받았다. 사라 굿과 사라 오스본은 마을에서 가난하거나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당했던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마녀 재판에 넘겨졌고, 특히 티투바는 심문 끝에 마녀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녀는 자신이 악마와 계약을 맺었으며, 마을에 더 많은 마녀가 존재한다고 증언했다. 이 발언은 공포를 확산시키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마녀로 지목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세일럼에서는 마녀로 고발되는 사람들이 급격히 증가했다. 단순한 개인적 원한이나 이웃 간의 갈등도 마녀사냥의 이유가 되었다. 1692년 여름에는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대부분의 피고들은 정당한 증거 없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는 브리짓 비숍(Bridget Bishop)으로, 그녀는 마녀로 판결받아 6월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심문 과정은 비논리적이고 비인도적이었다. ‘마녀의 표식’을 찾는 신체검사, 고문을 통한 자백 강요, ‘유령 증거(Spectral Evidence)’라는 개념이 동원되었다. 유령 증거란 피해자가 법정에서 “마녀의 유령이 자신을 공격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실제적인 증거 없이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7월부터 9월까지 18명이 추가로 처형되었으며, 일부는 교수형을, 한 명은 돌을 던지는 고문으로 사망했다. 심지어 4세의 도로시 굿(Dorothy Good) 같은 어린아이도 감옥에 수감되었다.

 

광기의 끝 – 재판의 종결과 사과

1692년 말이 되자, 마녀재판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점점 커졌다. 고위층에서도 마녀재판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유령 증거’에 의존하는 판결 방식이 비판받았다. 매사추세츠 총독 윌리엄 핍스(William Phips)는 부인의 친구가 고발되자, 재판을 중단하고 특별 법원을 해산시켰다.

 

1693년 5월까지 수감자들은 모두 풀려났으며, 일부는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미 처형된 19명과 감옥에서 사망한 몇몇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었다. 세일럼 마녀재판이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한 반성을 표명했다.

 

1697년, 매사추세츠 법원은 공식적으로 세일럼 마녀재판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희생자들에게 사과했다. 1711년에는 처형된 이들의 가족들에게 보상이 지급되었으며, 1957년에는 매사추세츠 주정부가 공식적으로 사면을 선언했다. 그러나 완전한 명예 회복은 2001년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역사적 의미와 현대적 시사점

세일럼 마녀재판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집단적 히스테리와 공포가 어떻게 사회를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다.

이 사건은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과 비교되기도 하며, 현대 사회에서도 비슷한 사례들이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 미국에서는 매카시즘(McCarthyism)이라는 형태로 또 다른 ‘마녀사냥’이 일어났다. 1950년대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가 주도한 공산주의자 색출 운동은 근거 없는 고발과 공포 조성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다.

 

세일럼 마녀재판은 또한 법의 공정성과 증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례가 되었다. 현대의 사법 시스템에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과 ‘합리적 의심이 없는 증거’가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세일럼에서는 이러한 개념이 철저히 무시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사회적 불안이 극대화될 때, 사람들이 비이성적인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경제적 불안정, 정치적 혼란, 질병 등의 위기가 발생할 때, 사회는 쉽게 두려움과 혐오에 휩싸일 수 있으며, 특정 집단이 희생양이 될 위험이 있다.

결국, 세일럼 마녀재판은 과거의 일이지만, 우리가 지속적으로 경계해야 할 교훈을 담고 있다. 공포와 편견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정의가 왜곡될 수 있으며, 억울한 희생자들이 생길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판단과 공정한 법 집행이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