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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역사

인도 독립운동과 간디의 비폭력 저항 전략

by info-lulu 2025. 3. 8.

간디의 생애와 사상: 비폭력과 진리의 추구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1869~1948)는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로, 비폭력과 진리(Satyagraha)의 원칙을 통해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였다. 간디는 서부 인도 구자라트주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으며, 인도 전통과 서양 교육을 함께 경험하면서 성장했다. 그는 1888년 영국으로 건너가 법률을 공부하였고, 이후 남아프리카로 이주하여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인종차별과 식민 통치의 부당함을 직접 경험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비폭력 저항 운동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인도 독립운동과 간디의 비폭력 저항 전략

 

남아프리카에서 간디는 인도인 공동체를 조직하고, 인종 차별 정책에 맞서 싸웠다. 그는 철도에서 백인 승객과 같은 자리를 요구하다가 기차에서 쫓겨나는 사건을 겪으며, 평생 비폭력 저항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의 사상은 힌두교, 자이나교, 기독교 등의 종교적 원리와 《바가바드 기타》, 톨스토이, 소로우 등의 철학적 영향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간디는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 곧 신의 뜻이라고 믿었고, 이를 위해 개인적인 절제와 금욕을 강조하였다. 그의 단식 투쟁과 소박한 생활은 이러한 철학의 일환이었다.

 

인도로 돌아온 간디는 1915년부터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영국이 제정한 로울렛 법(영장 없이 체포 및 구금이 가능한 법)에 반대하여 전국적인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는 영국의 폭력적인 탄압으로 이어졌다. 1919년 암리차르 학살 사건(영국군이 평화적인 시위대를 학살한 사건)은 간디가 비폭력 저항을 더욱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자로서 1920년대와 1930년대 동안 영국 상품 보이콧, 자급자족 운동(홈 스펀 운동) 등을 전개하였으며, 1930년 소금 행진을 통해 대중을 결집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소금 행진은 영국의 소금 세금 정책에 반대하는 상징적인 운동으로, 간디와 수천 명의 인도인이 385km를 걸어 바닷물에서 직접 소금을 만드는 것으로 영국의 법을 무력화하였다.

영국의 식민 통치와 인도 독립운동의 시작

18세기 후반부터 인도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지배를 받으며 식민 통치가 본격화되었다. 1857년 세포이 항쟁(인도 대반란)이 발생했지만 실패하면서 1858년 영국 정부가 직접 통치하는 영국령 인도가 성립되었다. 영국은 철도, 통신망 등 사회기반시설을 확충하면서 경제적 착취를 강화했고, 인도인들의 정치적 권리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85년 인도 국민회의가 결성되었으며, 초기에는 영국과의 협력을 통한 개혁을 추구했으나, 점차 독립을 목표로 하는 강경한 노선으로 변화해갔다.

 

간디의 등장과 비폭력 저항운동의 전개

마하트마 간디는 1915년 남아프리카에서 귀국한 후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끌기 시작했다. 그는 '사탸그라하'(진리의 힘)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한 비폭력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영국이 반정부 활동을 탄압하기 위해 제정한 로울렛 법에 반대하여 전국적인 항의 시위를 조직했으며, 1920년대에는 비협조 운동을 전개해 영국 제품 불매, 조세 거부, 공직 사임 등의 활동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간디는 민중을 단결시키고 영국의 통치 기반을 약화시키는 전략을 펼쳤다.

 

소금 행진과 영국의 강경 대응

1930년 간디는 영국이 인도인들에게 부과한 소금세에 저항하기 위해 ‘소금 행진’을 감행했다. 그는 78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약 380km를 걸어 단디 해안에 도착해 직접 소금을 생산함으로써 영국의 법을 공개적으로 위반했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영국 당국의 강경 진압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저항운동으로 발전했다. 결국 영국은 1931년 간디-어윈 협정을 체결해 일부 정치적 양보를 했지만, 인도 독립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1935년 인도 정부법이 제정되어 일부 자치권이 부여되었으나, 이는 여전히 제한적인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과 ‘인도를 떠나라’ 운동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인도를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시켰지만, 이에 대한 사전 협의가 없었다. 이에 간디와 인도 국민회의는 1942년 ‘인도를 떠나라’(Quit India) 운동을 선언하고 전면적인 비폭력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영국은 이에 강경 대응하여 간디를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강제 진압했으나, 전쟁이 끝날 무렵 영국의 통치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전쟁 후 영국은 식민지를 유지할 여력이 없었고, 인도 독립을 둘러싼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인도의 독립과 간디의 유산

1947년 영국은 인도의 독립을 승인했으나,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인도와 파키스탄으로의 분리가 결정되었다. 간디는 이에 반대하며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평화를 촉구했지만, 1948년 극단적 힌두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했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 전략은 인도 독립뿐만 아니라 이후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 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