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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역사

줄리어스 시저 암살과 이후 로마의 변화

by info-lulu 2025. 2. 20.

공화정의 위기와 줄리어스 시저의 부상


(키워드: 로마 공화정, 시저의 권력, 정치적 불안)
기원전 1세기경 로마 공화정은 극심한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원로원 귀족층과 민중파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으며, 군사적 영웅들이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줄리어스 시저는 갈리아 원정을 통해 막대한 군사적 명성과 부를 축적하며 로마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인이 되었다. 이후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시저는 로마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원로원 내에서는 그가 왕권을 추구하고 있다는 의혹이 커졌고, 이에 대한 반발이 점점 강해졌다. 시저는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려 했지만, 원로원 의원들의 불만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었다.

 

음모의 형성 – 원로원 귀족들의 결탁


(키워드: 원로원, 브루투스, 카시우스, 공화정 수호)
시저가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으로 임명되면서 그의 독재가 영구화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퍼졌다. 이에 공화정을 수호하려는 원로원 귀족들은 시저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 음모의 중심에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있었다. 브루투스는 시저에게 깊은 신뢰를 받고 있었으며, 그 자신도 공화정의 이상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카시우스를 비롯한 다른 원로원 의원들은 브루투스를 설득하여 암살 계획에 동참하도록 했다. 그들은 시저가 왕위를 노리고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암살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결국 약 60명의 원로원 의원들이 이 음모에 가담하게 되었고, 그들은 시저를 원로원 회의장에서 암살하기로 결정했다.

 

줄리어스 시저 암살과 이후 로마의 변화

 

이드의 날 – 시저의 암살


(키워드: 3월 15일, 원로원 회의, 최후의 순간)
기원전 44년 3월 15일, 로마력으로 ‘이드의 날(Ides of March)’에 시저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포룸으로 향했다. 당시 시저의 측근들은 불길한 예언과 경고를 듣고 회의 참석을 만류했지만, 시저는 이를 무시하고 원로원으로 갔다. 회의장에 도착한 시저는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았다. 음모자들은 순식간에 시저를 둘러싸고 단검으로 공격을 가했다. 시저는 여러 차례 칼에 찔렸고, 최후에는 브루투스마저 자신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고 “브루투스, 너마저도?(Et tu, Brute?)”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시저는 총 23번의 칼을 맞고 원로원 회의장 바닥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암살은 로마 공화정의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암살 이후의 혼란과 로마의 변화


(키워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제2차 삼두정치)
시저의 죽음이 곧바로 공화정의 부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로마는 더욱 심각한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암살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공화정을 수호하는 것이었다고 믿었지만, 민중들은 시저의 죽음을 분노와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시저의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후일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및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여 암살자들을 추적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필리피 전투에서 패배하고 자결했다. 결국 시저의 죽음은 로마 공화정의 부활이 아니라, 제정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후 로마 최초의 황제가 되었고, 로마 제국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시저 암살은 공화정을 지키기 위한 시도였으나, 결과적으로는 공화정의 종말을 가져온 역설적인 사건이었다.